지혜를 구하며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진정한 자유를 배우다 지혜를 구한다. 그리고 그 지혜가 내 안에서 희미해지지 않기를 다시 기도한다. 내가 말하는 지혜란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며 그분의 주권 아래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 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이 곧 바른 길임을. 그러나 삶의 현실은 늘 그 단순한 진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어느새 나는 내 삶의 주권을 다시 쥐고,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내 감정과 판단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선의 기준이 된다. 그 순간, 마음의 평안은 흔들리고 관계의 조화는 서서히 깨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10) 가끔은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수긍될 만한 삶의 기준이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란 과연 존재할까? 세상을 이롭게 하고, 나와 다른 사람과도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지만 세월이 쌓일수록, 그 답은 더욱 어려워진다. 인간의 마음은 늘 상황과 감정에 따라 요동치고, 확신은 이내 의심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세대를 넘어 이어져 온 신앙의 가치가 더욱 신뢰할 만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시대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수많은 고난과 시간을 거쳐 검증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한 시대의 교훈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생명의 언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사야 40:8)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내가 했다’는 확신에서 오는 자부심을 원한다. 그 성취감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새로운 일을...

하나님의 언어로 살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언어로 살아간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죄인으로 회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오래 붙들고 살아왔다.
사람에게 기대를 많이 걸수록 실망도 커졌고, 그 실망은 언제나 나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람을 대할 때, ‘너도 죄인이며 나도 죄인이다’라는 전제를 마음속에 두었다.
그렇게 하면 덜 상처받고, 덜 분노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장 23절

하지만 아이를 바라볼 때, 그 생각은 늘 흔들렸다.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아이의 얼굴에는 본래의 선함이 비쳤다.
그 아이에게 “너도 죄인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내 마음이 거부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나(창세기 1:27),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그 형상이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다는 것을.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 수도, 죄의 본성을 따라 살 수도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는 사실을.


죄성의 중력

순수했던 아이가 어른이 되면 왜 죄성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걸까.
그 이유는 세상이 너무 자연스럽게 죄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경쟁과 비교, 욕망과 탐욕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구조 속에서
죄성은 학습되고, 내면화되고, 합리화된다.

인터넷과 미디어가 지배하는 지금의 세상은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세속의 언어가 우리를 둘러싼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향한 끊임없는 영적 싸움이 없다면
우리는 죄의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로마서 12장 2절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베드로전서 5장 8절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멈춰 서 있는 일이 아니라,
세속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일이다.


통제의 유혹

나는 한때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이를, 나를, 믿음의 사람들만 있는 환경에 두면 어떨까.
세상과 단절된 울타리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더 잘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생각 속에는 ‘내가 조정할 수 있다’는 교묘한 교만이 숨어 있었다.
그럴싸하지만, 결국 통제의 욕망이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것뿐이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잠언 3장 5절

신앙은 완벽한 환경을 만드는 힘이 아니라,
불완전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뢰의 선택이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해지고, 믿음은 흔들림 속에서 자라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고린도후서 12장 9절


감정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일

나는 오랫동안 감정을 미루는 법을 배워왔다.
불편한 감정은 내 안에서 정리된 뒤에야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
그게 현명함이라 믿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두려움에서 비롯된 회피였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 시편 147편 3절

하나님은 내가 깔끔히 정리된 마음으로 나아가길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억눌리지 않은 감정 그대로,
서툴고 복잡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가져오길 원하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지금 느끼는 이 두려움과 허무함이 부끄럽지만,
이 감정이 제 안에서 멈추지 않고 주님께 닿게 해주세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회복의 시작임을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멈춤의 기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하기 전에 잠시 멈춘다.
그 침묵 속에서 조용히 묻는다.
“이 말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는가.”

그 질문이 내 일상의 기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언어로 살아간다는 것은
종교적인 문장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 묻는 태도다.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마태복음 5장 37절

그 태도가 내 아이에게, 내 공동체에게,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내가 남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신앙의 언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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